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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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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일 | 2019-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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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 ‘문화연구포럼 G’라는 행사에 다녀왔다. 20~30대 연구자들이 직접 조직하고 청중으로 모인 행사였다. 살짝 놀랍고 반가웠다. 방학 기간인데도 100명 가까이나 모였다니 놀라웠고, 그런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니 반가웠다. 다른 연구자의 발표를 통해 영감을 받고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풍경은 오랜만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건 학술행사가 결코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청중은 여전히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학술행사와 달리 이날 행사장을 감돌았던 자유로운 에너지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젊은 연구자들끼리의 자리였기에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중장년 연구자들 틈바구니는 부득불 어려운 자리가 될 수밖에 없고 큰맘(?)을 먹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게 되는데, 동년배들과의 자리니 상대적으로 대화의 문턱이 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히 세대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라면 어쩌면 같은 고민을 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기가 ‘낀’ 세대라고 말이다. 그것은 서로 별다른 접점을 찾지 못하는 위아래 세대 사이에서 때때로 통역자 구실을 해야만 하는 애매한 사회적 위치성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정중한 지면에서 자조를 늘어놓으려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단순히 뭉뚱그릴 수는 없겠지만) 민주화를 성취한 선배 세대와 포스트모던한 환경에서 성장한 후배 세대 사이의 거리가 그만큼 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정말로 (연구자들뿐 아니라) 우리들은 세대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나는 ‘세대는 없고 세대 효과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근 20년 동안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말인즉슨 우리가 무슨무슨 세대라고 부르는 말들이 대부분 허상에 가깝고, 그런 착시 현상은 특정 연령 집단이 역사적으로 같은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효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대와 세대 효과, 이 차이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어제도 오늘도 청년 세대는 늘 화두가 된다. 그 안의 지역적 차이, 성별 차이, 계급적 차이 등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시대적 환경과 정서구조를 ‘청년’이라는 표상으로 의인화하곤 한다. 그에 반해 오늘날 20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차이와 균열 그리고 대립을 고려한다면 이런 시도가 언제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왜 이 불가능한 일을 되풀이하는 걸까. 이런저런 세대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담론 장사를 할 수 있어서? 그들의 정서구조를 파악하고 소통을 시도하여 갈등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아니면 사회적 불만 세력이 될 수도 있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어쩌면 도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할 진보적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문제의식에서든 우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청년’들을 상상하고 그들의 세대적 특징을 구획지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오게 된다.(‘역시 그들은 우리와 다르군!’)
현실에 부재하는 청년을 알면 현실이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학술행사가 있던 그날 내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청년’이라는 신비적 외피를 벗겨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하면 유일한 것이라고 오인해왔던 우리가 아는 세계 말고도 다른 세계, 적어도 이미 충분히 커져버린 어떤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타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