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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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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일 | 2020-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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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정치화’라는 말을 쓰곤 했었다. 3S정책이 국민을 탈정치화시킨다, 투표율 저조는 20대의 탈정치화 성향 때문이다 등등. 이런 양상을 정치에 대한 혐오로 읽어야 한다는 반론도 있긴 했지만, 사람들이 정치 영역 바깥에 있다는 판단이라는 점에선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탈정치화라는 이야기가 소통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들 사이에 정치라는 대상에 대한 모종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탈정치화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투표율이 높아져서일까, 아니면 정치적 참여 수준이 개선되어서일까. 점점 더 명확해지는 사실은 우리가 알던 정치로서의 운동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정의기억연대 이슈를 보더라도 그렇다. 가장 사소한 것마저도 정치적인 것이라 했던가. 이 같은 관점 전환은 현실의 더 많은 부분을 성찰케 하는 미덕이 있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갖고 있던 정치에 대한 관념을 수정하게끔 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에 관해 많은 것을 새로 써야만 했다.
정치적 운동을 한다는 것이 민족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평화주의 등 이념적 쟁점들로 충분조건을 채울 상황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이를테면 우리는 정치를 위해 도덕을 챙겨야 하지 않던가. 아니, 어쩌면 정치와 도덕은 서로 분리 불가능한 범주인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알다시피 정치적 인식에 도덕적 규준이 작동했던 것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부정부패·환경문제·차별문제를 대할 때, 심지어는 고용문제를 대할 때도 우리는 도덕 내지 윤리라는 잣대로부터 시작해 권력의 기반을 흔들어오곤 했다.
정치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념으로서의 정치, 도덕으로서의 정치 등등. 여기에 또 무엇이 추가되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정도다. 브뤼노 라투르처럼 전환적 사고를 요구하는 사상가들은 정치를 정확한 본질 같은 것으로는 결코 결정될 수 없는, 이슈의 경계들에 도열한 연합들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확실히 오늘날에 와서 운동으로서의 정치가 이념적 적대에 근거해서 전체 사회의 진보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보증은 어디서도 구하기 힘들어 보인다.
한때 내 주변에서는 운동가가 기획자적 활동가, 또는 활동가적 기획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운동-정치의 영역에서 활동가들에게 이 같은 고민이 적용 가능한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는 기본이고, 포토샵이나 프리미어, 지문 투찰(전자입찰 용도)을 위해 각종 디바이스도 섭렵해야 하고, 후원회원 관리 및 재무회계를 위해 별도의 프로그램도 다뤄야 한다. 앞으로는 인공지능 시대에 맞춰 파이선 혹은 그 이상의 프로그래밍 언어까지 장착해야 할지 모른다.
‘활동’이라는 것의 개념적 범주를 넓히거나 하위 항목을 추가하면 그뿐인 걸까. 또 하나의 문제는 이 같은 실무적 숙련성이 운동-정치의 성패를 가르는 지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과의 접점이 많을수록 후원회원 관리 그리고 사업의 홍보 및 소통은 필수적이다.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재무 조달이나 회계 관리 등등이 필수적인 요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요 몇 주 동안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실무적 기초의 요소들이 가장 정치적인 쟁점, 내지는 그 방아쇠 구실을 하기도 한다.
사실 수년 전부터 ‘탈이념화’의 시대라는 말이 나왔던 바 있다. 정치가 실용성의 하위 범주가 되는 것 같아 마뜩잖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곱씹어볼 대목이 없지는 않다. 여기서 ‘화’(化)라는 언표에 주목한다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이념적 정치 외에도 다양한 비동시적 전선들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의 전환기에 살고 있다.